개구리 해부.

혼잣말. 2005. 7. 29. 03:11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올드 보이"에서 오대수가 자신의 혀를 자르는 장면 또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난 화면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볼 수가 없어 눈은 가리면서 오히려 머리 속에선 자연히 연상하고 그 지독한 고통과 끔찍함, 그리고 불안감에 가슴은 쿵쿵거리고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개든 고양이든 동물을 만지지 않는다. 그 표면에 느껴지는 촉감을 상상하기만 해도 몽골이 송연하다고 할까. 바퀴벌레나 파리, 하다못해 모기까지도 내가 직접 죽이는 것을 피한다. 약을 뿌려 죽이는 건 괜찮은데 특히 압사 시키는건 상상만 해도 정말 소름이 돋고 머리 속이 하얘진다. 무섭다. 역겹다. 가식이니 내숭이니 몰아대도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으니깐.



위와 비슷한 자극과 반응의 결합은 중학교 때 개구리 해부를 한 뒤로 생겨난 거다. 작은 사건이 있었다. 배를 가르던 도중 개구리가 마취에 깨어 내장을 쏟으며 과학실을 뛰어다녔다..는 그런 괴담 정도는 당연 아니다. 핀으로 개구리 고정하던 도중 개구리가 깨어나 그저 팔짝거린 정도였지만 안그래도 겁먹고 있었던 난 정말 놀랐다. 아니 거의 넘어갈 정도로 충격먹어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어깨너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해부과정을 관찰했음에도 난 '해부' 그 자체에 쇼크를 먹었다.

그 이후로 몇 년간 정말 고생했다.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징그러웠다. 곤충이고, 개고, 고양이고, 심지어 한동안은 인간이라는 것에도 그랬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곤충이나 동물들과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었다. 곤충 한마리에 벌벌 떤다고 아빠한테 꾸중 들은 적도 많았고, 애완동물을 쓰다듬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했다. 하지만 그게 그 수업 이후로는 굉장히 심해진 것이다. 심도있게, 확장되어. 뭐든 생명체가 몸에 닿는 게 굉장히 끔찍했다. 그리고 타인은 물론이고 내 몸에 살짝 난 상처나 조금 베인 상처조차도 혐오스러웠게 느껴졌으며 실제 사진이든 영상이든 그림이든 해부와 관련된 것들을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과학 책에 있던 해부된 그림들은 모두 오려버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말 괴로운 건 바로 '연상작용'이다. 사람들의 상처를 보거나 상처 입게 될 장면을 보면 곧 바로 내 몸의 상황과 연계해서 상상하게 된다. 만약 내 몸에 저런 상처가 난다면..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 고통과 끔찍함이 느껴지는 듯해서 몸서리를 치는 거다. 그래서 영화의 잔인한 장면을 잘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기에 제3자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바라보던데 난 그게 안된다. 그 영화 속의 당사자가 바로 내가 되어 그 고통을 느끼는 거다. 공충의 압사부터 시작해서 동물에게도 그러지않나 싶다.



으읔,,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머리 속에서 장난아니게 요동치고 거부하고 있는게 느껴진다. 하지만 꼭 어딘가 뱉어내고 싶었던 심정이고 말이었다. 그나마 요즘은 좀 많이 나아져 다행이다. 여전히 뭔가를 함부로 만지지도, 맘 편하게 보지도 못하긴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더니 조금씩 그 강도가 약해져 간다. 개구리 해부,, 도대체 그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 있어 몇 안되는 트라우마 중 하나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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